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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영화/드라마 리뷰

[드라마 토크] 역적 27화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유사성

by 밍키쓰 2017. 5. 2.

  <역적> 26화를 보고 혹시나..? 했는데 오늘 27화를 보고 확신했다. 조금 있으면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기념일이 다가온다. 그래서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도 <화려한 휴가, 각하의 회고록>이라는 제목으로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관련 내용을 내보냈다. 드라마를 제작할 때 부터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쨋거나, 의도한 것이 꽤 명백해 보인다.


1. 향주목 폐쇄  = 광주 폐쇄


     

▵"향주목 사람들이 드나드는 길목을 모두 봉쇄했으니 누가 향주목 백성들의 억울함을 알겠는가."


  <역적> 27화에서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향주목 사람들이 드나드는 길목을 모두 봉쇄했으니 누가 향주목 백성들의 억울함을 알겠는가." 연산군은 향주목을 혁파하기 위해 처음에는 검문 정도만 하던 수준에서 이제는 향주목을 고립시켜버렸다. 때문에 물자의 왕래 뿐만 아니라 사람의 왕래도 끊겨 향주목의 소식을 전해줄 사람들이 들어가지도, 나오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이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서도 드러난다.


◁ "광주 시외전화불통, 교통두절" 


(기사 링크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0052200209207004&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0-05-22&officeId=00020&pageNo=7&printNo=18039&publishType=00020)


  옆의 사진은 1985년  5월 22일 동아일보 사회 7면에서 발췌해 온 기사이다. 이 기사에서 보면 "광주 일원의 소요사태 로 광주시의 다른 지역간의 시외전화가 일체 불통되고 교통 편도 열차 고속버스 모두 광주나 송정리까지도 운행되지 않고 있다. 21일오전부터 광주시와 다른 지역간에 수동식이건 자동식이건 모든 시외전화가 일체 불통되고 있다..(중략)...체신부 관꼐자는 불통사유에 대해 "회선장애나 회선 절단은 아닌 것 같으며 현장에서의 특수한 사정 때문인 것 같다"고 밝혔다...(중략)....광주 목포로 가는 호남선 열차가 21일 밤930분 서울역발 179특급열차부터 전면 운휴됐으며 22일에는 호남선하행선이 이리까지만 운행되고 있다. 이에 앞서 21일 오전 11시 15분 서울역발 호남선 특급열차를 비롯, 3개열차는 광주로 들어가지 못하고 송정리까지만 운행했었다...(중략)...한편 고속버스는 21일 오전 9시부터 광주 목포행이 운행정지됐으며 이리 정읍 등 전북지역과 전남지역 중 순천 여수 지역에는 고속버스가 정상 운행되고 있다." 라고 되어 있다. 


  당시 광주를 고립시키고 광주 내에 일어나는 사건을 왜곡하고 또, 감추기 위해 모든 사람의 출입, 물자의 출입을 금지시켰다. 그렇게 외부와의 왕래를 차단시켰다는 것은 그만큼 광주 내에서 떳떳하지 못한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뜻했다. 몰래 사명감을 가지고 들어가 기록한 기자들이 아니었다면 지금 남아있는 사진조차 어쩌면 못 건졌을 지도 모른다. 



2. 향주목 사람들은 역적이다. = 광주 사태는 빨갱이 때문이다.


                 ▵ "헌데 나라에서 향주목 백성들이 약탈과 방화를 일삼고 있다고 소문을 내고 있답니다."


  연산군은 향주목을 폐쇄시켜면서 동시에 향주목에 대한 유언비어를 퍼뜨린다. 향주목 백성들이 약탈과 방화를 일삼고 있다고 소문을 낸 것이다. 이와 더불어 관군들과 연산군은 향주목 백성들을 향해 외친다. "역적이야!" 뭔가 오버랩 되지 않은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광주 민주화 운동을 이끈 학생들, 민간인들은 폭도로 몰리고 있었다. 다음 기사를 보자.


이계엄사령관 담화 발표 "광주사태 고정간첩 침투 선동 악화면 파국 초래" 

(기사링크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0052200099201016&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80-05-22&officeId=00009&pageNo=1&printNo=4372&publishType=00020 )


  이 기사는 1980년 5월 22일 매일경제 1면에서 발췌해온 기사이다. 이 기사 내용을 보면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21일하오 담화를 발표, 광주사태의 악화는 국가민족에 파국적인 겨로가를 초래할 것이 명약관화 하므로 광주 시민들이 불순분자 의 지역감정 유발책동에 휘말리지 않고 이성을 회복하여 질서유지에 앞장서 주기를 당부했다."라고 되어 있으며 이희성 계엄사령관의 담화문의 일부는 이렇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본인은 오늘의 국가적 위기에 처하여 국가민족의 안전과 생존권을 보위하고 사회안녕질서를 유지해야 할 중대한 책무를 지고 있는 계엄사령관으로서 현재 광주시일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작금의...(중략)...지난 18일 수백명의 대학생들에 의해 재개된 평화적 시위가 오늘의 엄청난 사태로 발전된 것은 상당수의 타지역 불순인물 고정간첩 들이 사태를 극한적인 상태로 유도하기 위하여 여러분의 고장에 잠입, 터무니 없는 악성 유언비어의 유포와 공공시설파괴, 방화, 장비 및 재산 약탁활동을 통화여 계획적으로 지역감정을 자극, 선동 하고 난동행위를 선동한데 기인된 것입니다. 이들은 대부분이 이번사태를 악화시키기 위한 불순분자 및 이에 동조하는 깡패 등 불량배들 로서 급기야는 예비군 및 경찰의 무기와 폭약을 탈취하여 난동을 자행하기에 이르렀으며...."


 이탤릭체로 표시한 부분들의 표현을 보자. 그들은 광주 민주화 운동을 이끈 사람들은 고정간첩으로 몰아갔다. 민주주의를 위하여 들었던 총과 폭약을 마치 간첩이 선동하여 국가를 뒤엎고자 한 것처럼 담화문을 발표했다. 앞서 말했듯, 폐쇄된 상태였던 광주는 이러한 기사들을 볼 수 없었으며 그들의 억울한 사정도 알리기 힘들었을 것이다.



아래는 관련된 또다른 기사이다. 



▵"광주 일원 소요 학생 시위 시민합세, 군경, 민간 6명 사망"


  이 기사는 1980년 5월 21일 경향신문 1면에서 발췌한 것이다. 제목만 보면 사실 뭔가 싶지만 내용을 보면 어떻게 광주 민주화 운동을 단순 '소요 사태' 혹은 '데모'로 몰아갔는지 알수 있다. 

"...(전략)...계엄사령부에 의하면 이번 소요사태  는 최초 전남대학생 6백여명이 거리에 나와 '비상계엄령해제' 등을 요구하며 시위에 들어갔으나 20일에는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터무니없는 각종 유언비어 가 유포되어 이에 격분한 시민들이 시위대열에 가세함으로써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중략)...민간인 사망자의 신원은 확인되지 않았으나 군.경 5명의 사망 원인은 시위 군중이 탈취한 차량이 군, 경 대열에 뛰어들어 그 충격으로 인해 사망한 것이라고 밝혔다. 계엄사령부에서 확인한 바에 의하면 광주 지역 소요가 악화되어 극심한 난동현상 을 보이고 있는 원인은 전국비상계엄이 선포되자 서울을 이탈한 학원 소요 주동학생 및 깡패 등 현실불만 세력이 대거 광주에 내려가 사실무근한 유언비어를 날조하여 퍼뜨린 데에 기인됐다고 했다..(후략)."


이 기사에서 말한 "유언비어"란 다음과 같다.


-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에 와서 여자고 남자고 닥치는대로 밟아죽이고 있기 때문에 사상자가 많이 난다.

-18일에는 40명이 죽었고 금남로는 피바다가 되었는데 군인들이 여학생들의 브래지어까지 찢어버린다.

-공수부대 애들이 대검으로 아들 딸을 난자해 버리고 브러지어와 팬티만 차게 해서 장난질을 한다.

-공수부대가 몽둥이로 머리를 무차별 구타, 눈알이 빠지고 머리가 깨졌다.

-한신대 학생 하나가 그날 다쳐서 죽었다.

-학생들 50여 명이 맞아서 피를 흘리며 끌려다니고 있다.

-계엄군이 출동하여 APC로 사람을 깔아죽였다.

-계엄군이 점거하고 있는 가톨릭센터 건물 안에는 시체 6구가 있다.

-데모 군중이 휴가병을 때리자 공수부대요원이 군중을 대검으로 찔러죽였다.

-계엄군이 달아나는 시민들에게 대검을 던져 복부에 박혀 중상을 입었다.


이것이 과연 "유언비어"였던가? 



3. 사망자들을 모아놓은 장면


       

                   ▵관군의 학살 후 사망한 사람들을 모아놓은 <역적>의 장면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사망한 사람들은 모아놓았던 강당의 사진


   관군들이 남녀노소 불문하고 칼로 벤 뒤 향주목 사람들은 관청 뜰에다 사망자들을 모아놓고 하얀천으로 덮어수습했다. 5.18 민주화 운동 사진들을 찾아보면 너무나 유사한 사진을 찾을 수 있다.



4. 학살의 장면


        

                    ▵드라마 <역적>의 학살 후의 장면                                         ▵계엄군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 시민군


   역적 27화에서 관군이 왔다간 뒤의 장면과 실제로 계엄군들이 시민들을 살해하고 난 뒤의 사진은 매우 유사하다. 위의 사진은 전남도청을 끝까지 사수했던 시민군의 모습이지만 이외에도 일반 학생, 시민들을 살해한 뒤에 일렬로 엎어놓은 채로 둔 모습을 찍은 사진들이 조금만 찾아보면 나온다.


   

                ▵<역적>에서 관군이 향주목 백성들을 학살하는 장면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공수부대가 시민들을 다루는 사진

   

  <역적> 27화에서 보면 위 사진처럼 오랏줄로 묶은 백성들을 모아놓고 칼로 무참히 베는 장면이 나온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에도 공수부대들은 줄로 묶거나 혹은 그냥, 학생을 비롯한 일반 시민들을 이처럼 모아놓고 때려죽이거나 총검으로 베었다. 



5. 봄을 갈망하는 노래 = 애국가를 부르는 광주 시민


       

                    ▵<역적>에서 '익화리의 봄'을 부르는 향주목 백성들                  ▵계엄군에 맞선 시민군


  <역적> 27화에서는 향주목이 모두 봉쇄되었다는 관군들의 으름장에도 불구하고 굴하지 않고 '익화리의 봄'을 부르는 백성들이 나온다. 한 명에서 시작된 노래는 점점 퍼져 큰 파동을 이루고 결국 관군도 따라부르게 만든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계엄군에 맞서 노래를 불렀던 시민들의 마음도 이와 같을까. 익화리의 가사도 흔히 민주주의를 '봄'에 비유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느껴진다. 


<역적> OST 중 하나이기도 한데 <역적> 27화에서 백성들이 부른 '익화리의 봄'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봄이 와도 봄이 온다 말을 못하고

동장군이 노할까 숨죽여 웃는다.

해가 떠도 해가 뜬다 말을 못하고

밤바다가 노할까 숨죽여 웃는다


에헤에야 어허어야

사립문을 열어두시오

에헤에야 어허어야 

칼바람이 멎을 것이니


봄이 와도 봄이 온다 말을 못하고

동장군이 노할까 숨죽여 웃는다.

해가 떠도 해가 뜬다 말을 못하고

밤바다가 노할까 숨죽여 웃는다


에헤에야 어허어야

사립문을 열어두시오

에헤에야 어허어야

칼바람이 멎을 것이니

(반복)


  타는 목마름으로 봄을 부르짖던 것과 비슷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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