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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영화/영화 리뷰

부끄러워서,<동주>1편: 윤동주 시인

by 밍키쓰 2016. 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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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주>다. <귀향>과 고민 했지만 <귀향>은 보다가 영화관에서 혼자 너무 처량맞게 울 것 같아서 <동주>를 택했는데 왠걸, <동주>가 끝나고서 나는 울고 있었다. <동주>는 연극 같은 전기적 영화이다. 영화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윤동주 시인이 심문을 받는 것 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치 기억을 떠올리듯 영화는 흘러 간다.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를 보다보면 오래된 영화 박광수 감독의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 생각 난다. 뭐랄까, 콕 집어 말할 수는 없는데 느낌이 비슷하다. 흑백이라서 그런걸까. 이 영화를 잘 만들었다고 느꼈던 점은 관객이 온전히 윤동주 시인이라는 인물에게 집중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곳에 강하늘이라는 배우는 보이지 않는다. 나는 윤동주 시인이 침을 삼킬때면 같이 삼켰고, 숨을 삼키면 같이 숨을 삼켰고, 말을 삼키면 같이 감정을 삼켰다. 연극 같은 영화라고 한 이유는 나도 모르게 윤동주 시인이라는 영화 속 인물과 같이 호흡했기 때문이다. 이준익 감독이 <동주>라는 영화를 제작하면서 흑백으로 만든 이유는 "사람들이 기억하는 흑백 사진 속 윤동주 시인의 이미지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라고 했는데 그러한 면에서 아주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영화 내용 자체도 윤동주 시인이라는 인물에게 집중하게 만들지만 '흑백영화'라는 장치도 내가 인물에게 온전히 집중하게 만들었다.




△시를 쓰는 윤동주 시인(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는 중요한 장면 마다 윤동주 시인의 시를 강하늘의 목소리로 읊는다. 처음에는 다소 발랄하고 들떠있지만 윤동주 시인의 죽음이 다가올 때, 그리고 그가 <서시>를 읊을 때 쯤이면 목소리는 깊고 무겁고 슬프다. 그렇게 장면 장면 읊어주는 시를 듣다보면 윤동주 시인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장면을 보며 시를 썼는지 상상하게 되고 마치 윤동주 시인이 된 것만 같은 느낌을 준다. 아마도 영화가 윤동주 시인과 같이 호흡하게 하고자 만든 장치일지도 모른다. 

  




△송몽규와 대비되는 특징을 가진 윤동주 시인(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이 영화가 훌륭한 이유는 다소 민족적이고 소위 '국뽕'을 빨게 할 수 있었던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보고 나면 영화가 온전히 윤동주 시인에게 바치는 오마쥬 같은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내가 이순신 장군을 존경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명량>에 대해서 다소 불만이 있는 이유는 <명량>이 이순신 장군이라는 인물에 초점을 둔 영화라기 보다 흥행을 위해 이순신 장군이라는 민족적 영웅을 이용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주>는 곱씹고 되짚어 봐도 윤동주 시인이라는 인물을 온전히 살려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는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의 서사도 훌륭하다. 윤동주 시인 인생의 기승전결을 다루는 극적인 서사가 아니다. 윤동주 시인의 친구 송몽규라는 장치를 통해 시가 윤동주 시인에게 어떠한 의미 였는지, 어떠한 상황에서 써낸 시였는지를 보여준다. 그래서 관객이 윤동주 시인이라는 인물에 더더욱 집중할 수 있게 해준다.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동주>를 봐야 하는 이유이다.


 내가 울었던 이유는 윤동주 시인이 죽고 윤동주 시인의 아버지가 피끓는 울음을 토해내서가 아니다. 그 장면은 슬프다. 그렇지만 그건 당연한 감정이다. 그러나 내 머리와 마음을 깊게 찔러 울게 만든 장면은 윤동주 시인의 마지막 심문 장면이다. 형사가 서명을 하라고 할 때, 송몽규는 하나하나 분노에 차 울부 짖으며 말한다. "내가 이렇게 했어야 했는데, 그게 한이 돼서! 그렇게 못한 게 한이 돼서! 서명을 한다." 그러나 윤동주 시인은 사형언도서에 서명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 대사가 내 마음을 깊게 찔렀다.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이시대에 태어나 시인이 되길 바랬던 제가 너무 부끄러워서 서명을 못하겠습니다.


 이 대사는 몇 번이나 곱씹어도 울컥울컥 가슴을 뜨겁게 한다. 윤동주 시인이 뭘 그렇게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바라고, 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가고, 왜 그렇게 '이다지도 욕될까'라고 느꼈을까가 이 대사에 모두 담겨 있다. 그리고 나는 이 대사를 곱씹으며 나를 생각했다. 그리고 정지용 시인의 대사를 다시 생각했다.


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 부끄러운 거다.


 우리는 살면서 항상 부끄러움, 후회, 창피함을 느낀다. 그런데 이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이 단순히 낯선 사람을 보아서 또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해야 해서가 아닌 내 행동에 반성하면서 느끼는 부끄러움이었을 때 중요하다. 정지용 시인이 말한 '부끄러움'은 바로 그런 부끄러움을 말하는 것이다. 이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은 염치 없는 사람이고 안하무인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끄러움은 나를 바로 잡게 하고 올바른 행동을 하게끔 해주는 좋은 감정이다. 그렇다고 해서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이 내 잘못된 행동에 대한 면죄부가 되어서는 안된다. 다만 우리는 정지용 시인의 말처럼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안다. 그러니까 무던히 노력해야 한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그가 내뱉은 망언들로 시끄럽다. 그는 한나라당 원내 대표 시절 "일본 관광객이 줄어드니 독도 문제를 무시하자"라는 취지의 말 부터 시작해서 연탄 봉사를 온 유학생에게 "네 피부색과 연탄색이 똑같다", "전국이 강남만큼 수준이 높으면 선거가 필요 없는데" 라는 말까지 여기 다 나열하기도 힘들다. 김무성 대표가 망언을 내뱉는 이유는 그가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부끄러움이란 사람답게 만드는 중요한 감정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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