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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영화/예능 리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와 함께 보는 LA폭동 일지 - 꼬꼬무 16회

by 밍키쓰 2022. 2. 7.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 시즌 3 16회에 LA 폭동 이야기가 등장했습니다. LA 폭동은 원래 오랜 인종 갈등이 터져 백인을 겨냥하고 일어난 흑인폭동입니다. 그런데 왜 LA 한인타운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을까요?

 

로드니 킹 사건


LA폭동(4.29사태)의 시발점은 바로 로드니 킹 사건. 1991년 3월 3일 캘리포니아주 LA에서 27세의 흑인 청년 로드니 킹(Rodney King)이 음주 상태로 차를 운전하다 경찰관의 정지 지시를 무시하고 달아나게 됩니다. 사실 경찰관은 과속 운전으로 정지시킨 것이었지만, 당시 그는 가석방 중이었기 때문에 음주 운전으로 적발될 것 같은 두려움으로 순순히 잡히지 않았던 것.

 

그러나 그가 저항한 거에 비해 심하게 폭행당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추격전 끝에 킹을 붙잡은 4명의 경찰들이 곤봉 등으로 50차례에 이르는 무차별 구타를 한 것이죠. 이로 인해 로드니 킹은 왼쪽 다리가 부러지고, 얼굴에 스무바늘을 꿰매는 부상을 입게 됩니다. 그런데 때마침 한 주민이 2층 베란다에서 새로 산 캠코더로 이것저것 풍경을 찍다가 그 구타 장면을 찍게 되고 이게 방송이 되면서 흑인 사회에 엄청난 분노가 일게 됩니다. 이 구타 사건으로 인해 로드니 킹은 청각 장애 판정까지 받을 정도였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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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로 법정 공방이 벌어지지만 4명의 경찰관 중 1명만 재심이고 3명이 무죄판결을 받게 되죠. 당시 재판에서 배심원 구성도 흑인이 1명도 없었고 백인 10명, 스페인계 1명, 아시아계 1명으로 구성되어 있다보니 이런 결과가 나온 것.. 이에 대해 흑인계인 LA 시장 톰 브래들리도 ‘믿을 수 없는 평결’이라고 했습니다.

무죄 소식이 전해지자 LA 중심가에서 남쪽으로 약 10킬로미터 떨어진 흑인 거주 지구 사우스 센트럴의 한 교차로에서 “정의가 없으면 평화도 없다”라고 적힌 종이를 든 4명의 흑인이 사람들에게 호소하기 시작햇습니다. 그리고 오후 6시 반 분노한 흑인들이 한 트럭에서 백인 운전사 레지널드 데니를 끌어내려 구타했고, 이 장면이 헬리콥터에서 촬영돼 그대로 TV에 방영되게 됩니다. 이날밤,  어둠이 내리면서 본격적인 폭동이 시작됐고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4·29 LA폭동’입니다.

 

 

왜 화살은 한인타운으로 돌아왔을까


사실 LA 폭동은 백인과 흑인 간의 오래된 인종 차별이 로드니 킹 사건으로 폭발한 것. 처음  폭동을 주도해했던 흑인들은 가장 부유한 베버리힐스 쪽으로 진격하게 됩니다. 하지만 베버리 힐스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죠. ㅎㅎ 베버리 힐스를 방어하는 쪽에서 여길 넘으면 사살하겠다하니 흑인들이 그 선을 넘지 않았던 것. 결과적으로 한인타운이 백인사회를 지켜주는 완충역할을 하게 된 것. 결국 한인타운에서 약탈과 방화는 기본이 되어버리고 이 폭동으로 인해 LA 한인타운 90%가 파괴됩니다.

 

 

두순자 사건이 원인이다?


LA폭동의 원인으로 두순자 사건이 언급될 때가 있지만, 사실 그것은 잘못된 사실입니다. 근본적으로는 로드니 킹 사건과 백인과 흑인 사이의 아주 골 깊은 인종갈등 때문입니다. 

 

두순자 사건은 LA흑인빈민지역에 상점을 운영하는 55살 가정 주부가 1991년 3월 16일, 흑인소녀를 총으로 쏴 죽이게 된 사건입니다. 사건 당시 두순자는 손님으로 온 흑인소녀가 쥬스를 가방에 넣는 걸 보고 도둑으로 생각하고, 그녀의 책가방을 움켜쥐었는데 덩치가 좀 컸던 그 흑인 소녀가 주먹으로 그녀의 얼굴을 때리게 되고, 이에 두순자는 바닥에 넘어져 잠깐 정신을 놓았다가 이내 정신 차리고 카운터 뒤에 권총을 집어 들어 소녀에게 쏘게 됩니다. 결국 흑인 소녀는 그 자리에서 숨지게 되고, 이 일로 두순자는 살인죄로 기소됩니다. 

 

사망한 흑인소녀는 사실 범죄와 거의 무관한 아이였고 학교에서도 우등생,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는데 정당방위라는 두순자의 주장은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않지만, 과실치사로 결론이 나게 됩니다. 하지만 흑인 사회는 이 판결에 대해 분노를 갖게 되죠. 

 

그런데 중요한 건 LA폭동 이 일어나기 1년 전 사건이라는 점! 그러니 LA폭동의 시발점이라고 하기에는 말이 안돼죠. 그러나 미국 주요 언론사 ABC, KABC, LA타임즈에서 LA폭동 후 이 두순자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마치 두순자 사건 때문인 것처럼 몰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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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들은 어디 갔었나


물론 흑인이 한인에 대해서 어느 정도반감을 갖고 있었던 건 사실입니다. 사는 건 백인이 사는 지역에서 살면서 장사는 흑인 사는 지역에서 하고, 비싼 차를 몰고 다닌다면서요... 아니 그걸 그럼 꽁으로 받았습니까??? 

 

LA폭동 사건에 한인들이 가장 무력감을 느꼈던 건 바로 경찰인력의 부재. 가장 유명한 말이 "Where is cops!"라는 말이라고 할 정도로 폭동이 일어났음에도 경찰들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었죠. 취챚하러 온 기자들이 경찰들을 찾을 정도였다고 해요.

 

 

결국 스스로를 무장해 지켰던 한인들


결국 LA 한인타운은 그들이 노력해 쌓아온 것들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무장하기로 합니다. 초기에는 무방비 상태로 당했지만 더이상 흑인 폭도들에게 이민1세대, 2세대로 열심히 노력해서 쌓아온 전재상을 날릴 수 없었으니까요. 한인들은 코리아타운을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합니다.

 

한국 유학생들, 그리고 인근 지역, 원거리에 살고 있는 해병전우회 한인, 특전사 전우회, 코리아타운 매장주(매장 세곳 중 1곳은 사장님이 월남전 참전용사)를 주축으로 하여 12 ~24시간 거리를 운전해서 코리아 타운으로 모이게 됩니다.

 

이런 과정에서 슬픈 일도 생기는데요. 한인타운이 흑인 폭도의 공격을 받았던 둘째날 밤 한 한인 상점을 지키기 위해 중무장하고 한인타운으로 가던 한인 학생이 약탈꾼으로 오인받고 한인타운을 지키던 방어대의 총에 사살 당했던 사건도 있습니다.

 

왼쪽 사진 아저씨가 총포사와 전당포를 운영하던 분으로 자기 전당포가 털리자 총포사에 있던 무기를 한인들에게 나눠줬다고 합니다.

우리의 재산은 우리가 지킨다.
미국 경찰도 그리고 미국 방송사도 더더욱 믿을 수 없다.

 

한인들은 자신들이 뼈빠지게 노력하여 모은 재산이 잿더미로 변하고 약탈 당해 텅텅 빈 상점들의 모습을 보며 더이상 그냥 당할 수만은 없었던 것. 한인 가게를 구하기 위해 중무장을 하고 코리아타운으로 모여 방어대를 만들어 전투를 벌이기 시작합니다.

 

옥상에는 모래자루를 쌓아서 진지를 구축하여 저격병들을 배치하고 한인 코리아타운 각 매장 앞에도 모래자루를 쌓아 진지를 만들어 바리케이트를 설치하면서 폭도들의 진입을 차단합니다.

 

미국 언론은 교활하게도 이렇게 대치하는 모습을 방송하며 LA폭등을 한인과 흑인과의 갈등처럼 몰아가죠. 장난? ㅅㅂ 개빡침.

 

한인타운은 어느덧 해병 전우회, 특전사 전우회, 코리아타운 매장주 유학생들, 그리고 한인 1세대 할아버지들까지 모여들기 시작하여 해병전우회와 특전사전우회의 지시와 명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입니다.

 

한인 라이도 방송과 무전기를 이용해 연락을 주고 받으면서 차량을 개조해 흑인 폭도들이 약탈을 하려고 하면 즉시 차량을 타고 이동하겨 흑인 폭도들에게 대응사격을 하며 한인 상점을 구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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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할머니와 아주머니들은 총탄이 날라다니는 이 상황에서도 방어대들의 식사를 위해 음식 광주리를 머리에 올려 달리기 시작합니다. 그야말로 '전쟁터'라고 표현하는 상황 속에서도 내새끼들 입에 밥 먹어야 하니까!!!!

 

LA폭동 3일째, 미국 메이저 방송사들은 한인타운의 총격전을 집중보도하며 한인상가 지붕에 설치된 M3 자동화기, 머신건들을 보여줍니다. 오면 뒤진다 이거에요! 여튼 한인타운에 잘못 들어가면 죽을 수도 있다는 소문이 퍼지며 한인타운은 조금씩 안정을 찾아갑니다. 하지만 자료 사진을 찾아보면 이미 잿더미가 된 상덤 앞에 망연자실하는 한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한인타운이 약탈당할 때는 가만히 있던 미국은 백인들 구역으로 흑인 폭도들이  침임하기 시작하자 그제서야 주둔 군인을 투입합니다. 에이 시발 다 탄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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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로 본 LA폭동


6- 폭동 기간 : 4월29일 발생해 5월3일까지 지속
55-사망자수 : 총격 사망자 35명(경찰과 방위군 진압 과정 총격 사망자 10명 포함), 방화 사망자 6명, 교통사고 사망자 6명, 폭행 사망자 2명 등
1,700 - 연방수사국 등 LAPD 이외 사법기관에서 투입된 인원.
2000 - 부상자수
3,767 - 방화 등 화재 피해 건물 수
10,000 - 전체 피해 업소
10,000 - 방위군 등 출동 군 병력
1,1000 - 폭동기간 체포자 숫자
1,000,000,000 - 폭동으로 인한 재산 피해
6,000,000,000 - 각종 피해보상 등 회복에 투입된 비용


한인 피해는
1 - 한인 사망자
730명 - 폭동 후 외상증후군 등으로 치료 받은 한인 숫자
2,300 - 한인업소 피해 숫자
30,000 – 폭동후 LA한인타운에서 인종화합과 평화 촉구 대행진에 참여한 한인 숫자.
350,000,000 - 한인사회 피해 추산액(LA폭동으로 인한 피해액의 절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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